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 (문단 편집) === 나폴레옹과의 만남에서 원수가 되기까지 === 베르티에는 1753년 2월 20일 프랑스 베르사유 근교에서 프랑스 육군 공병대 장교였던 장 바티스트 베르티에의 아들로 태어났다. 베르티에는 13세에 왕립 공병학교에 입학하고 공병 지식을 쌓은 뒤 17세에 입대했다. 그는 혁명전쟁 초기 여러 장군들의 부관 및 참모로 근무했다.1796년에는 신설된 이탈리아 방면군의 사단장이자 참모장이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Gros-Louis_Alexandre_Berthier.jpg]] 1799년 11월 18일,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때 베르티에는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도왔다. 그는 확고한 나폴레옹 찬동자였다. 통령 정부 기간 동안, 베르티에는 국방장관을 지냈다. 1800년, 나폴레옹은 마렝고에서 오스트리아군과 격돌했다. 이때 베르티에는 명목상 육군 예비군의 수장이었지만, 실제로는 언제나처럼 나폴레옹의 참모천장으로서 동행했다. 이 전투 직후, 베르티에는 민간 외교 사업에 고용되었다. 이때 마렝고는 미국 특사와 협상하여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파는 대가로 1500만 달러를 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 베르티에는 스페인에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804년, 황제에 즉위한 나폴레옹은 베르티에를 다른 18명의 장군들과 함께 원수로 진급시켰다.나폴레옹은 교모한 전략으로서 상대를 공략하기 위해 종종 베르티에와 머리를 맞대어 의논하곤 했다. 베르티에의 조언은 대부분 옳았고, 나폴레옹은 그를 매우 신뢰했다. 1806년, 베르티에는 바그람 공작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807년에는 치안장관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잘나가던 베르티에는 1808년 3월에는 먼 사촌인 마리아 엘리자베스 프란체스카와 결혼했다. 1809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공격했을 때, 베르티에는 참모장으로 참석했고, 1809~1810년 반도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직접 이베리아로 진군했을 때도 참모장으로서 황제를 보좌했다.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감행했다. 이때 베르티에 역시 참모장으로서 나폴레옹과 함께했다. 하지만 원정은 대실패로 끝났고,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나폴레옹은 몰락해 갔다]]. 베르티에는 끝까지 나폴레옹과 함께했지만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